
유해진이라는 배우를 생각하면 어떤 장면이 먼저 떠올라? 나는 한동안 웃긴 장면부터 생각했어.
"럭키"에서 킬러와 뒤바뀐 무명 배우의 모습도 그렇고, "공조"에서 현빈과 티격태격하던 모습도 그렇고, "타짜"의 고광렬처럼 능청스럽게 분위기를 풀어주는 역할도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거든.
그런데 최근 유해진이 출연한 작품들을 이어서 보다 보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어.
유해진은 단순히 웃기는 배우가 아니라 사람을 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배우에 더 가까운 것 같더라.
최근 "야당"에서는 욕망에 사로잡힌 검사로, "소주전쟁"에서는 회사에 인생을 바친 직장인으로, "왕과 사는 남자"에서는 어린 단종을 지켜보는 촌장으로 등장했어.
캐릭터만 보면 서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 모두 유해진이 연기하면 낯설지 않아.
나는 유해진이 캐릭터를 자기와 완전히 분리해서 만들어내기보다, 자신이 가진 사람 냄새를 인물 안에 자연스럽게 섞는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해.
엄흥도에게서 보인 유해진의 힘
최근 작품 중에서는 "왕과 사는 남자"를 먼저 이야기하고 싶어.
유해진은 여기서 단종이 유배된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를 연기했어. 처음부터 거창한 영웅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아니야.
마을을 살리고 싶어서 유배지를 받아들였는데, 막상 그곳에 온 사람이 폐위된 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휘말리게 되지.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유해진의 연기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흥도는 분명 역사적인 인물이지만, 화면 속에서는 굉장히 생활적인 사람이야. 걱정하고, 당황하고, 고민하고, 때로는 투덜거리기도 해. 그런 평범한 반응들이 쌓이면서 오히려 단종을 향한 마음이 더 크게 다가오더라구.
유해진도 완성된 영화를 보고 몇 번을 봐도 슬펐다고 이야기했는데, 특히 박지훈과 함께한 장면을 떠올리며 인터뷰 중 눈물을 보이기도 했어. 그 장면을 보고 나니 왜 유해진의 연기가 오래 기억에 남는지 조금 알 것 같았어.
감정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상황을 충분히 받아들인 다음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하는 거야.
그래서 관객 입장에서는 "배우가 슬퍼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엄흥도가 정말 저 사람을 잃기 싫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돼.


"야당"에서는 웃음을 지웠다
그런 유해진이 "야당"에서는 상당히 서늘한 얼굴을 보여줬어.
그가 맡은 구관희는 밑바닥에서 출발해 성공을 좇는 검사야.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라면 믿었던 사람도 배신할 수 있는 인물이지. 평소 유해진에게서 익숙했던 인간적인 친근함과는 꽤 거리가 있어.
그런데 오히려 나는 이 작품에서 유해진의 장점이 더 선명하게 보였어.
유해진은 인터뷰에서 선한 역할보다 악한 역할이 더 재미있다고 말하면서도, 악역을 전형적으로 연기하지 않는 것이 숙제라고 이야기했어. 이 말이 참 유해진답다고 느껴지지 않아? 악역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나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얼굴을 보여주면 오히려 단순해지잖아. 구관희는 자신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고, 그 과정에서 남을 밀어내는 것 역시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유해진은 그런 인물의 자기합리화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 말투와 눈빛, 상대를 대하는 태도에서 조금씩 드러내지.
그래서 평소 친근했던 배우의 차갑게 돌아선 모습이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어.
종록은 왜 미워하기 어려웠을까
"소주전쟁"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유해진의 인간미가 살아났어.
유해진이 맡은 표종록은 자신이 몸담은 소주회사 국보에 인생을 바친 재무이사야. IMF 외환위기 속에서 회사가 흔들리자 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이지.
사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종록의 삶의 방식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 회사를 위해 가족과의 관계까지 희생했고, 성공과 성과를 바라보는 방식도 젊은 세대와 상당히 다르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종록을 쉽게 비난하기는 어려워.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냥 직장이 아니라 자신의 청춘이고 삶이기 때문이야.
유해진은 인터뷰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일부러 표현하기보다 장면 속에 스며 있게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어.
나는 이 이야기가 유해진의 연기를 꽤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생각해.
"종록은 인간적인 사람입니다"라고 보여주는 게 아니라, 술자리에서의 모습이나 동료를 대하는 태도, 회사 이야기를 할 때 달라지는 표정 같은 작은 부분에 그 사람의 인생을 담는 거지. 그래서 관객이 캐릭터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이해하게 만들어.
흥행 성적은 아쉬웠지만 유해진은 "소주전쟁"이 한 번쯤 내가 어떤 가치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했어. 나는 오히려 이 지점이 유해진이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와도 닿아 있다고 봐.
흥행만 놓고 보면 더 안전한 선택도 있었을 텐데, 자신이 연기할 인물에게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본 것 같거든.


어떤 작품이든 자연스럽게
유해진의 최근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재미있는 말을 하나 발견했어.
그는 자신의 연기에 대해 "제 연기는 항상 똑같습니다. 다르지 않아요. 그냥 유해진일 뿐입니다"라고 말했어.
그러면서 자신이 완전히 다른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는 아니며, 이야기 속에 잘 녹아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지.
처음에는 겸손한 말처럼 들렸어. 그런데 필모그래피를 떠올려보니까 꼭 겸손으로만 볼 이야기는 아닌 것 같더라.
"왕의 남자"의 조연부터 "타짜", "전우치", "베테랑", "럭키", "공조", "택시운전사", "1987", "말모이", "올빼미", "파묘"까지 생각해보면 맡은 역할의 성격은 정말 제각각이야. 그런데 유해진이라는 배우가 완전히 지워지는 건 아니야.
대신 그 배우의 존재감이 캐릭터보다 앞으로 튀어나오지 않아. 나는 이게 정말 어려운 연기라고 생각하거든.
스타 배우가 등장하면 캐릭터보다 배우가 먼저 보일 때가 있잖아. 그런데 유해진은 어느 순간부터 유해진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어. 웃길 때는 정말 웃기지만, 웃음을 멈춰야 하는 장면에서는 그 익숙한 표정을 거둬버리고 인물의 감정만 남겨.
나는 이것이 유해진이 오랫동안 사랑받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
유해진의 출연작, 어떤 작품부터 볼까
유해진이라는 배우를 제대로 파본 적이 없다면 나는 "왕과 사는 남자"부터 추천하고 싶어.
최근의 유해진이 어떤 방식으로 감정을 쌓아가는지 보기 좋은 작품이기 때문이야. 특히 박지훈과 함께하는 장면을 보면 큰 동작이나 긴 대사가 없어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알 수 있어. 실제로 박지훈 역시 유해진에게 받은 에너지를 다시 돌려주는 것이 자신의 숙제였다고 말했어.
유해진의 더 강렬한 모습을 보고 싶다면 "야당"을 추천해.
늘 친근하게만 느껴졌던 유해진이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을 연기하면 얼마나 서늘해질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거든.
반대로 사람 냄새 나는 유해진이 좋다면 "소주전쟁"도 괜찮아.
흥행 여부와 별개로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어디에 걸고 살아왔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니까.
그리고 유해진의 능청스러운 매력이 궁금하다면 "럭키"나 "공조"를 빼놓을 수 없어.
나는 이 네 작품을 추천하고 싶어.
"왕과 사는 남자"에서 깊은 감정을 느끼고, "야당"에서 낯선 얼굴을 만나고, "소주전쟁"에서 사람 냄새를 느낀 다음, "럭키"나 "공조"에서 편하게 웃어보는 거야.
그러면 유해진이라는 배우가 왜 오랫동안 여러 장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조금은 알수있게 될 거야.
결국 유해진은 매번 완전히 다른 배우가 되기 때문에 좋은 배우라기보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작품에 맞게 얼마나 자연스럽게 섞어낼 수 있는지를 아는 배우에 가깝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