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순함의 대명사, 손예진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맑고 여린 첫사랑의 이미지로 기억되어 온 배우야.
나 역시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여름향기"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손예진 특유의 깨끗하고 아련한 분위기가 생각나거든.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청순한 이미지와 달리, 손예진이 선택해온 캐릭터들은 생각보다 훨씬 과감하고 폭이 넓었어.
"연애시대"에서는 사랑에 실패한 뒤에도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물이 됐고,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는 당시의 기준으로 꽤 파격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을 연기했지. "비밀은 없다"에서는 딸의 실종을 추적하면서 점점 극단적인 감정에 빠져드는 엄마가 됐고, "덕혜옹주"에서는 역사 속 인물의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냈어.
그러다 "사랑의 불시착"에서는 당당하고 사랑스러운 재벌 상속녀 윤세리가 되어 다시 한 번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어.
미리가 눈에 들어온 이유
손예진의 최근 출연작 "어쩔수가없다"는 2018년 "협상" 이후 7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이었어. 박찬욱 감독이 연출하고 이병헌과 부부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라는 점부터 상당히 화제였지.
그런데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흥미로웠던게 손예진이 맡았던 미리라는 캐릭터는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계속 시선이 가더라구. 남편 만수가 직장을 잃고 삶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가족의 일상도 조금씩 흔들려.
그런데 미리는 그 상황에서 매번 감정을 폭발시키지않고 오히려 현실에서 볼 법한 방식으로 반응해.
걱정하고, 화내고, 잔소리하고, 때로는 남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결국 가족의 생활을 붙잡고 있지.
예전 손예진의 연기를 보면 감정이 얼굴에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이 많았는데, "어쩔수가없다"의 미리는 감정을 조금 안쪽에 숨겨놓은 사람 같았어. 그래서 눈빛이나 말투의 미세한 변화가 더 중요해졌지.
실제로 손예진도 미리는 원작에서 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박찬욱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캐릭터의 서사를 발전시켰다고 밝혔어. 극적인 대사나 클로즈업이 많지 않은 인물이라 오히려 디테일하게 존재감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웠다고도 했어.
이 부분을 알고 다시 보면 미리라는 인물이 조금 다르게 보여.
"분량이 적은데도 기억에 남는 연기"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역할이었던 것 같아.


배역은 달라도 낯설지 않은 배우
손예진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꽤 과감한 선택들이 많아.
"연애시대"의 유은호는 사랑에 실패한 뒤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아내가 결혼했다"의 주인아는 당시 대중적인 여성 캐릭터와는 꽤 거리가 있었어.
"비밀은 없다"에서는 평범한 엄마의 얼굴에서 점점 광기에 가까운 감정을 끌어냈고, "덕혜옹주"에서는 역사적 인물을 연기했지.
그런 작품들을 거치고 "사랑의 불시착"의 윤세리로 돌아온 것도 재미있었어.
윤세리는 재벌 상속녀라는 설정만 보면 굉장히 만화적인 인물이잖아. 그런데 손예진이 연기하니까 이상하게 현실적인 면이 생겼어.
말투는 당당하고 행동은 과감한데, 혼자 남았을 때 느끼는 외로움은 또 굉장히 구체적이었거든.
나는 손예진이 캐릭터를 설득하는 방식이 여기 있다고 생각해. 설정은 아무리 극단적이어도 감정만큼은 현실적으로 가져오는 것.
그래서 장르가 달라져도 배우가 완전히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사랑의 불시착" 이후 7년, 더 여유로워진 얼굴
"사랑의 불시착" 이후 "서른, 아홉"을 거쳐 손예진은 결혼과 출산, 육아라는 시간을 보냈어.
그리고 "어쩔수가없다"로 다시 배우의 자리로 돌아왔지.
손예진은 복귀를 앞두고 자신에게 배우로서 "두 번째 챕터"가 시작되는 느낌이라고 이야기했어. 이전과 비교해 연기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여유가 생겼고 시야가 넓어진 것 같다고 말했지.
나는 이 말이 최근 손예진의 분위기를 꽤 잘 설명한다고 생각해.
예전에는 캐릭터를 어떻게 보여줄지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그 인물이 왜 그런 사람이 됐는지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느낌이야.
특히 "어쩔수가없다"의 미리처럼 크게 소리치지 않는 인물을 선택했다는 점도 흥미로웠어.
7년 만의 영화 복귀라면 누구나 더 강한 역할을 선택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 그런데 손예진은 오히려 존재감을 과시하기 어려운 역할을 골랐어. 나는 이 선택 자체가 지금의 손예진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

전혀 다른 손예진을 볼 차례
그리고 지금 손예진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넷플릭스 "스캔들"이야.
2026년 9월 18일 공개 예정인 이 작품에서 손예진은 조씨부인을 연기해. 조선시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뛰어난 재능과 욕망을 품고 있지만, 시대의 제약 때문에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인물이야.
더 재미있는 건 손예진이 사극에 도전하는 게 약 24년 만이라는 점이야.
나는 이 작품이 손예진의 다음 변화를 확인하기에 꽤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
특히 조씨부인은 단순히 사랑에 빠지는 여성이 아니라, 직접 내기를 제안하고 상황을 움직이는 인물이야. 공개된 예고편에서도 조씨부인이 조원에게 먼저 위험한 내기를 제안하는 모습이 강조됐어.
정숙한 사대부 여인의 모습과 욕망을 숨기지 않는 모습 사이의 차이도 상당히 커 보여.
"클래식"이나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손예진을 처음 기억했던 사람이라면 꽤 낯선 얼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이런 역할이 지금의 손예진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예전의 손예진이 감정을 표현하는 배우였다면, 지금의 손예진은 감정을 숨기는 방법까지 알고 있는 배우처럼 느껴지거든.
손예진을 다시 본다면 이 작품부터
손예진의 작품을 처음부터 전부 찾아보면 좋겠지만 출연작이 너무 많잖아. 그래서 서로 다른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몇 편을 골라 보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건 "연애시대"야. 지금의 손예진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궁금하다면 이 작품만큼 좋은 출발점도 없는 것 같아. 화려한 설정 없이도 사람의 감정을 오래 끌고 가는 연기를 볼 수 있거든.
그다음은 최근 출연작인 "비밀은 없다".
손예진에게도 이런 얼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감정의 방향이 거칠게 바뀌는 작품이라, 익숙했던 이미지를 깨는 재미가 있어.
대중적인 손예진이 궁금하다면 "사랑의 불시착"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추천하고 싶어.
마지막으로 9월 18일 공개되는 "스캔들"까지 이어서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
나는 손예진이라는 배우의 가장 큰 매력이 결국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처음 봤을 때는 익숙한 얼굴인데, 작품을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전혀 다른 사람이 계속 나타나는 것. 그래서 손예진을 오래 본 사람일수록 다음 작품에서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가 더 궁금해지는 배우인 것 같아.

